대구 가톨릭대학 성서학교 성서경시대회
어제(2013년 12월 29일) 교중미사때 영성체송으로 성가 496번이..
몇십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이 노래를 들으면
지금도 감격에 겨워 눈물이 글썽글썽..
2005.10. 7 2
14년의 세월이 훌쩍 흘렀는데도(1991년 6월 27일)
성가 496장 '주님은 우리 사랑 하셨네'를 주일미사때 간간히
들어볼때가 있는데 그럴때마다 지금도 그 어떤 뜨거운 감동같은 것이
울컥울컥 치밀어 오를때가 참 많습니다.
아직도 그 때 그 일이 생동감있게 떠오르는..
원없이 맘껏 힘찬 박수를 받아 보았고 한순간에 깜짝 스타가 되어 보았고
형제님과 자매님들이 벌떼같이 몰려들어 악수세례도 많이 받아 보았고..
성서경시대회 졸업미사가 끝나고 열린 다과회때는형제님들이 제 옆으로만
몰려와 담소를 나누었던 일이며..
바로 이런 맛 때문에 정치인들이 은퇴를 못하는구나..
3조 자매님들은 30점 문제를 놓치지 않았으면 우리가 우승인데 아쉬워 했었고..
000자매님이 30점 문제를 스톱 걸어놓고 못맞추는 바람에 30점이 마이너스..
그래서 5등에 머물렀다가 극적으로 껑충..
레지오 서기로 회의 진행과정을 적어나가면서성서공부의 필요성을 느껴서
레지오단장님께 성서공부 하고 싶은데 추천해 달라고 하였더니
여기를 추천하는 것이었습니다.
단서를 붙이시기를 들어가기는 쉬우나 졸업은 어렵더라는..
여기는 글자 그대로 성서사관학교로 혼자만 알라면서
몇몇 자매님이 도전했지만 졸업은 못한 것 같다는..
어려우면 얼마나 어려우라 싶어 입학은 했는데
(저는 무슨 일이든지 앞뒤 안 재고 확 저질러 놓고 수습해가는 스타일임)
머리가 설레설레 돌아갈 정도로 주문이 많은 동네였습니다
결석 3번이면 무조건 탈락.. 지각 3번은 결석 하나에 해당.
지각도 1교시 이후로 들어오면 결석에 해당.
매 학기 마다 리포트(원고지 30장 분량) 제출해야 하고 D학점이면 탈락
중간중간 시험을 치는데 60점 이하면 탈락..
극성 맞았던 방송모니터 활동으로 리포트 작성하는감각은 이미 익혔던 터라
그 분야는 항상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중간중간에 치는 시험이 항상 불안..
시험이 얼마나 까다로웠는지 수강생들중 최고점수가 80점대에서 맴맴 돌았습니다.
방송모니터는 대구방송 KBS모니터로 시작해서중간에 남편이 서울사무소로
퍄견근무 서울 올라갔더니 본사에서 서울모니터 자리가비었다면서 저에게
기회를 주셔서 뛰게 된것..
성서시험이 부담이 되었던 것은그 당시 아이들 한문
가르치느라 따로 성서공부를 위해 복습할 시간이 없었던 것..
이 동네 시험이란 게 비스무리한 답을 써도 안됩니다.
오로지 박광호 신부님이 가르쳐 주신 그대로, 토씨 하나 틀려도 틀린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힘들었지만 어쨌든 턱걸이 점수로 탈락은 간신히 면했습니다.
성서수업은 정말 힘들었지만 사시사철 뚜렷하게 변하는 대학교정의
자연환경에 자신을 묻어 버릴때의 그 잔잔한 행복감..
더구나 제가 속한 3조는 신부님이 강의에 들어가시 전에 본받으라고
칭찬 하실 정도로 팀웍이 너무 잘 되었었고 매달 대구시내
음식점 순례하면서 박광호 신부님도 초청..
박신부님과 시간을 함께 할수 있었던 것도 좋은 추억꺼리.
성서학교는 구약성서 1년 신약성서1년 과정으로 짜여 있는데
신입생은 해마다 들어오기 때문에 첫해에는 선배를 모시는 후배가 되고
그 한해를 보내면 새로운 아우를 맞아 들이면서 선배가 되는 것입니다.
선배가 되면서 제가 3조 조장이 되었는데 처음엔 좀 힘들었습니다.
저만 월급쟁이 마누라였고 나머지 자매님들은 의사 교수 사업가부인들로써
카리스마랄까 자존심이랄까 교만함이랄까 그런 것이 알게 모르게
풍겨 나와 처음엔 통솔이 만만치가 않았지요..
만나서 식사하기로 해놓고 날짜를 정한다는게 도무지..
그래서 나중에는 몇날몇시 어느장소로 정했으니 나올 사람은 나오고
골프치러 갈 사람은 골프치러 가고.. 똥배짱을 한번 거세게
튕기고 나서야 단합이 되었을 정도..
그렇게 잘 살면서 개성이 강한 회원들이 많을 경우엔 양해를 구하지 말고
회장이 알아서 단독으로 정하는게 좋습니다.
유대감을 가지라고 구역단위로 묶었다는데 오히려 저는 이 경험을 통해서
통솔력을 터득하였고 이 경험이 훗날 역학공부 할 때 총무직을,
친목회에서 회장이란 감투를 쓰게 되었을 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졸업미사 전에 성서경시대회가 열립니다.
그러니까 탈락하지 않고 졸업하게 되면 성서경시대회에 2번 출전 하는셈..
첫번째는 등외에도 못 들었고 그래서 마지막 성서경시대회는 등수 안에
들어서 졸업을 해야갰다는 욕심으로 똘똘 뭉쳤지요.
더구나 내가 조장(組長)으로 있는데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겠다는 생각외엔...
덕분에 며칠동안 부엌살림이 엉망이었지만..
몇번 만나서 머리 맞대고 작전을 세우는 등..솔직히 저로선
2조의 조장(組長)을 기어이 꺾어야 겠다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영세명이 영 생각이 안 나는데 부산수녀원 대구수녀원에서 성서공부를 하고
마지막으로 여기로 왔다는 자매님인데 수업시간에 박광호 신부님의
고난도의 질문에 척척 대답을 해서 모든 시선이 그 자매님께 쏠리는 바람에
3조 조장으로써 자존심이 엄청 상했습니다.
아예 그 자매님 때문에 그 팀이 작년에 이어 올해도 우승할꺼라는 것이
지배적이었으니 제 심기가 불편해도 보통 불편한 게 아니었지요.
시간은 흘러 경시대회 이틀 전..
아이들에게 토요일에 몰아서 한문 가르치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이틀간
그 동안 정리해둔 대학노트를 붙잡고 씨름..
하나하나 ?'어 보다가 박광호신부님이 유난히 '사랑'이란 대목에 많은 시간을
할애 하면서 가르치셨다는 것이 섬광처럼 스쳐 가더군요.
정말 순간적으로..
1고린도전서 13장을 설명하실 때도 그랬고
천주교 3대 지향목표를(사랑 회개 공동체) 설명 하실 때도..
사도행전 로마서 히브리서에 들어가셔도..
하다못해 성지순례가서도 관광버스 차안에서
유심초의 '사랑이여'를 부르셨다는 것도 기억..
수업시작 미사 때도 영성체송으로
'사랑의 송가'가 많이 불리웠다는 것도 새삼스레 기억이 났고.
어쩌면 이게 마지막 100점에 걸릴지도 모르겠다..
그 때 부터 고린도전서 13장을 한문속성법 원리를 응용해가면서
이틀동안 딸딸 외우기 시작..
박광호신부님 툭유의 성격으로 미루어 볼 때 토씨하나 틀려도 인 될 터이고..
성서경시대회를 시작하기 전에 규칙 설명..10점 짜리는 몇 문제 20점 짜리는..
맨 나중 문제는 100점 짜리.. 이 규칙은 작년과 동일..
규칙이 바뀐 게 있다면 한 사람 앞에 다섯문제 정도만 배당..
아마도 이 규칙은 그 자매님이 작년에 있은
경시대회에서 혼자 싹쓸이 하는 바람에 새로 생긴 것..
혼자서 마구 설쳐대는 바람에 되게 재미없게 끌나버려 규칙을 정하신것도 같은데..
저는 10점 20점은 버리고 30점짜리부터 공략하기로 잔머리
굴리고 있는데 그 자매님은 10점 20점 짜리 해서 세 문제나..
신부님이 "한 사람 앞에 다섯 문제에요" 할 때 그 때 서야
고 단위 점수가 걸려 있는 문제가 나올 때 까지 침묵을..
그래서 저는 여유있게 30점짜리 문제 1개 50점 짜리 2개 맞추어서 130점을 기록.
따라서 침묵을 지켜야 하는 그 자매님 보다는 실전을 쌓아가면서 100점짜리 문제에
도전할수 있는 여유를 가진셈..
그 자매님이 다섯개 규칙에 묶이지 않았다면 달성하기 어려운 개인기록..
솔직히 성서실력은 그 자매님이 저보다 월등하긴 한데 똑같이 3문제 맞추고서도
머리쓰기에 따라 이렇게 점수차이가 난다는 사실을...후훗..
마지막 문제를 남겨 놓을 때 까지도 고린도전서는 안 나왔고.
각 팀들의 성적을 알려 주고 마지막 한 문제는 100점 짜리 라서
어느 팀이 맞추느냐에 따라 등수가 달라진다는 것도 부연 설명..
박광호 신부님:"마지막 문제.. 어느 팀이 맞추냐에 따라 등수가 달라집니다.
이 멘트를 하도 많이 하셔서 수녀님이 그 소리 그만 하시라고 해서 한동안 폭소..
자아 문제가 나갑니다.고린"
저:"스톱"
박광호 신부님:"문제 다 안 나왔는데요.고린밖에..답을 말씀하세요.
틀리면 100점 감해 집니다."
저:"1고린도전서 13장을 말씀 하시는거지요" 하고 은근 슬쩍 유도질문을 던졌더니
박광호신부님:"글쎄요. 10초안에 정답이 안 나오면 탈락합니다."
옳거니..
아니면 아니라고 하면서 땡하고 치시는 건데
"글쎄요" 하시는 것으로 보아서 바로 그거구나 그거..
그래서 안심하고 열심히 외운 고린도전서를 줄줄 좔좔...
거의 다 끝나갈 무렵에 '딩동댕' 차임벨이 울리자 요란한 박수소리가
강당 안을 때렸고 3조 자매님들이 "우리가 우승이다" 하고
소리치면서 춤을 덩실덩실.. 다른 팀들은 아낌없이 박수를 쳐주며
3조 자매님들의 어깨동무 탭댄스에 박자를 맞추어 주었고..
시간을 너무 끌자 수녀님이 제지를..
최종적인 점수를 알아보자고 하면서 칠판에다..
조금 있다가 일등을 유지하고 있던 팀이
"5점 차이로 우리가 우승이다"하고 그릇 깨지는 소리를..
역시 우승은 그 자매님 팀이였지만 인기는 단연 우리팀이 차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팀은 100점 짜리를 우리가 맞추었으니 일등이나
다름없다고 응수를 해서 모두들 웃어 재키느라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저 때문에 등외로 밀려난 팀이 박광호 신부님에께 거칠게??? 항의.
한 문제에 100점이나 할당 하는 게 어디 있느냐고 다시 하자고..
그러자 박 신부님은 처음에 규칙을 설명 할 때 아뭇 소리 없다가
다 끝나고 나서 왜 이렇게 말이 많으냐고 하셔서 또 한번 폭소의 도가니..
참 웃기는 건 우승한 팀에서 떼거지로 몰려와서 저에게 악수를 청해 왔고
3조 자매님들은 악수하지 말라고 해서 강당안이 또 한번 뒤집어 졌습니다.
5등팀에서 맞추었기 때문에 즈이네는 가만하 앉아서
우승했으니 제가 무지무지 이뻐 보였겠지요..
3조 자매님들이 왜 개인상은 없냐고 하니까
박광호 신부님 특유의 딱 그 한마디..
"우리 천주교는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이런 열광적인 장면이 연출 될 수 있었던 것은(계속 폭소와 박수의
소용돌이로 수녀님이 졸업미사 분위기를 조성하느라 힘들어 하셨지요)
아마도 '고린' 할 때 스톱해서 알아 맞춘 순발력에 모두가 놀랬던 것 같았고.
(따지고 보면 순발력이 아니라 제 작전이 보기좋게 맞아 떨어진건데...)
5등팀이 마지막 문제로 준우승 했다는 것.
그리고 모두가 주목해온 그 자매님을 몰리치고 생각지도 안했든
얌전하게 생겨먹은 제가 전면에 부각된 것이....
(얼굴생김은 순하게 생겼다는 소리 많이 들음)
흥분을 가라앉히고 졸업미사가 있었는데
영성체를 모실 때 흘러나온 노래가 바로 성가 496장..
누구보다 주님은 우리 사랑하셨네
밤의 별같이 우리를 이끄시네
빵을 같이 나눌 때 주님 사랑 주시네
우정의 성사 하느님의 빵
내 성체를 받아 먹어라
내 성혈을 받아 마셔라
나는 생명이요 사랑이니라
우리 너의 사랑에 이끄소서.
저는 이 성가를 그 날 처음 들었는데 멜로디가
애잔하게 들려서 더 인상에 남았던 듯..
(나중에 알고 봤더니 흑인영가..)
아마도 모르긴 몰라도 그 졸업 미사 때 제가 제일 감동스런
간절하고도 벅찬 마음으로 성체를 모셨을 꺼라는..
그런지 석달 후 남편이 서울로 직장을 옮기게 되어 19년간의 대구생활을 마감..
서울로 이사 오기 전 3조 자매님들과 박신부님과 점심식사하고 대구시내 드라이브를...
저로선 성서경시대회를 끝으로 대구생활을 멋있게 근사하게 마감한 셈
박신부님과 자매님을 저희집으로 점심초대..
어떻게 신부님을 집으로 초청을 다하다니 하면서 자매님들이 설레설레..
그런 상차림도 처음 보았다면서 놀라와들 했고..
(아낌없이 돈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매달 돌아가면서 자매님들 집에서 가졌는데 너무 경쟁일변도로
치닫는 것 같아서 한바퀴 순회한 다음 음식점으로 방향선회..
3조 자매님들은 제가 서울 올라간 후로
이끌어갈 중심이 없어지면서 헤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각 성당에서 간부로 맹활약하고 있기때문에
대구가면 연락은 될 것 같고..
젬마 자매님이 2년전에 하늘나라로 가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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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당구역모임이 오후 2시에 저희집에서 있었고
000자매님이 진주로 만든 묵주팔찌를 제게 주셨습니다.
매달 성당모임을 이 집에서 열리게 해서 마인하다는 마음을 담아서..
미안할 것 까지는 없으실 텐데..사람 오면 반기는 게 제 특징이거늘..
성서학교 2학년 올라갈 때 성서학교 교육담당 수녀님이 다른 데로
전근 가시게 되었다며 묵주팔찌를 선물 주셨습니다.
성지순례 갈 때 제 옆자리에 앉았던 자매님께 자리영보를 구하신후
앉으셨는데 그 때 무척 많은 대화를..
그래서 저만 보면 그 수녀님은 멀리에서도 반갑다고 뛰어 오시기까지 하셨는데..
(수녀님께 제가 시력이 안좋으니까 마주치면 먼저 아는체 해달라고 부탁 한것임)
오늘 선물 받은 진주묵주팔찌를 보는 순간 수녀님의 묵주 팔찌가
생각났고 그래서 성서학교시절이 너무도 그리워서 써본 글입니다.
수녀님의 묵주팔찌는 아직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