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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게 참 간단하지가 않네요

옥란재 2015. 7. 21. 13:30

 

사진 / 2009년 4월 17일 아파트화단에서..

 
 

 

2014/03/20 23:29

 

 

어제(3월 19일) 경기도 분당에 사시는 李스텔라 형님이 다음달에

죽전 40평대 아파트로 이사 가게 되었다는 전화를 주셨습니다.

“어머나, 돈 많이 벌으셨네요”

“에잇,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경제적 활동을 하지 않잖아.

자식놈들이 분당집이 좁다고 돈 모아서 산거에요”

분당 30평대가 좁다니.. 좁을거에요.

다섯 자녀들이 모두 모이면 많이 좁겠지요.

李스텔라 형님은 저보다 다섯 살 위로 모든 여성들이 바라는

그런 로망의 삶을 살고 계십니다.

한달에 두 번 정도 안부전화 주고 받는데

사귄지도 벌써 햇수로 20년 넘어갑니다...

94년도인가,‘수지침 요법'이 전국을 강타할 때

명동성당에서 주관하는 ‘수지침 기초반’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강사는 유태우 수지침협회 代表理事이신 강선명씨..

형님이나 저나 시력이 안 좋아서 맨 앞쪽 칠판 중앙에 자리 잡다보니

같이 앉게되는 햇수가 많아졌고 그렇게 해서 친하게 된 것입니다..

 

 

기초반 중급반 고급반 연구반까지 1 년을 함께 했었고

졸업후에는 매달 레지오가 없는 셋째 금요일 정각 12시에

명동성당 성모상앞에서 만났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불어도 항상 그 자리에서..

장마철은 피했고..

약속시간 1초도 늦는 법이 없는 똑 부러진 성격들이라

둘만의 모임은 잘 지켜졌고 명동맛집, 찻집순례로 데이트..

우리 두사람은 공통점이 참 많았습니다.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 주관이 뚜렷하고 약속시간 1초도 안 틀리데다

천주교신자였고 ‘레지오 서기’로 몇 년 동안 활동을 했었다는 것도

같았고 그래서 더 유난히 가까워졌던 것 같습니다..

레지오 서기이다 보니 신부님 강론 내용을 세밀하게 분석을 하면

옆에서 듣는 사람들이 감탄사를 할 정도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상대방에게 자극을 받으면서 자기 발전에 엔간히

신경을 썼다고나 할까요.  경쟁이나 하듯이 책도 많이 읽었고..

우연의 일치인지 98년도엔가 형님은 경기도 분당으로

저는 천안으로 이사를 갔지만 우정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知的인 호기심이 대단하신 분이라 지금도 문화강좌는 기본이고

그림과 서예 배우러 다니십니다.  회원들과 전시회도 여러 번..

李스텔라 형님이 참 부러운 게 다섯 자녀들이(3남 2녀) 탄탄한

직장인으로 능력을 인정 받고 있는데다 孝心들이 아주 남다르다는 것..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손주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면

그냥 친구사이로 변한다고 합니다.

어느 집 아이가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입학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돈을 거두는데 한순간에 거짓말 안보태고

50만원 70만원이 걷혀 진다고 합니다.

 

걸핏하면 날 잡아 모이기도 잘하고 생활비는 의학박사인

큰딸이 다 부담하고 나머지 자녀분들은 올적마다 용돈으로

몇십만원씩 내놓아 그 돈으로 그림도 그리고 서예도 배우고

작년에는 수녀님이 관장하는 단체에 가서 봉사활동도 하셨다고 합니다.

지금은 무릎이 안좋아서 그림과 서예에만 매달리는 처지..

손주 외손주들이 커가니까 식구 모두가 다 함께 자기엔

좁다고 불평불만이더니 즈이들끼리 뭐라뭐라 쏙닥쏙닥하더니

돈모아 죽전 40평대 아파트를 엄마에게 선물..

비뚤어진데 없이 성품이 널널한 이 형님과 한시간 넘게 통화를

하고나면 이유모를 그 어떤 행복감에 잦아들 때가 참 많습니다.

진짜 정말 행복한 사람들은 말씨와 웃음부터가

틀리는데 그 기운을 제가 받는다고나 할까요.

그런데요 그런데요..

지금은 다 지나간 일이지만 이 헝님에게 제가 영원히

용서 받지 못할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만날적 마다 큰아들이 눈이 너무 높아서 큰일이라고

걱정을 해싸서 중매를 섰습니다.

역시 딸내미 눈이 너무 높아서 큰일이라는 남편의

회사 上司이이기도 한 분의 딸을 소개했는데

서로 스펙들이 만만치 않아서인지 선본지 석달만에

서울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참으로 엄숙하고도 우아한 결혼식이었는데..

李스텔라 형님은 며느리를 참 자랑스러워 했었습니다.

서울에 올라오면 시어머니가 다니는 성당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는

며느리가 그렇게 예뻐 보였다고 합니다.

시누이들은 동생과 올케가 서울 올라오면 한달음에

달려왔고 설거지 같은건 절대로 못하게 했다는데..

성당신부님도 수녀님도 레지오 단원들도 며느리 한번 잘 보셨다고

부러워들 했다고 하는데...  여기까지 말씀하시면서 제 앞에서

엉엉 우셨습니다..그것도 손님들이 많은 명동 찻집에서..

어느 날 제게 들려줄 말이 있다고 하면서 성모상 앞이 아닌

어느 찻집에서 만나자는 전화를 주셨고 자리에 앉자마자

큰아들과 며느리가 이혼을 했다고 할 때 저로써는 완전 날벼락..

결혼한지 6개월 지나서 파토가 났다고 합니다.

아들은 신혼 6개월은 너무 행복했었다고 합니다.

퇴근후에 집에 들어가면 맛난 저녁 밥상이 차려지고

장모님도 여러 가지 반찬을 해서 날라주고

그런데 그 행복이 6개월로 끝이었나 봅니다.

아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파국을 막아보려고 6개월 동안

애를 썼고 일부러 휴가를 내서 장인장모 모시고 여행까지

다녀 왔다는데 도저히 나이질 기미가 것 안보여서

그 때서야 집에다 전하는 바람에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새댁이 친정 가는 길에 옛날 첫사랑을 만났고

그 때부터 집안 살림 팽개치고 걸핏하면 가출..

한,두어번은 용서 했다고 합니다.

“자네도 알잖아, 내가 며느리를 얼마나 이뻐하고 아꼈는지.”

알지요. 1년 되어도 아기소식이 없어서 한약도 지어 보내고

불쌍한 아기들 돌보면 좋은 소식 있을까 싶어서 영아원에 가서

봉사활동도 하셨다는 거 제가 다 알지요.

불편해 할까 봐 광역시에 있는 ○○큰 아들집에 잘 안내려 간 것도..

처음엔 신앙인으로써 용서하자고 아들을 달랬지만

그 한약재가 하나도 안건드리고 냉동실에서 잠자고 있는 걸 보고

그때서야 마음을 접었다면서 한참을 우셨습니다..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제 큰탓이로소이다..

남편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 하고 며칠 동안 끙끙대며 아팠습니다.

남편은 두어달 동안 그렇게 전화를 걸어도 안 받아서 이상 했었더라는..

큰아드님은 마음의 상처를 달래려고 영어회화 학원에 다녔고

거기서 참한 아가씨를 만나 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대기업체 次長이라 인연이 금새 나타나리라고 생각은 했지오마는

그 자매님 처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싸아 하니 아파오더군요...

몹시도 후회를 했다고 하는데..

장인되시는 분은 이혼한지 한달후 사위에게 전화를 걸어

미안 하다면서 한참이나 우셨다는데..

 

 

孫女가 벌써 中三이라니 세월이 참 많이 흐른 것 같은데도 저는

아직도 죽을죄를 지었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자매님은 아직도 인연을 못 만났고 친정에 얹혀사는 모양..

이것도 얼마 전에 남펴회사 동료부인이 알려주어서 알았습니다.

중매 잘해 주었다고 받은 金패물을 돌려 드리려고 하니

“자매님이 무슨 죄가 있어. 중매인이 그런 거 까지

책임져야 한다면 중신 설 사람 한사람도 없게요”

지금 제 수첩에 善男善女의 명단이 10명쯤 있는데

중신서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습니다.

아무리 四柱八字가 좋아도 궁합이 좋아도 本人이 엇나게

마음먹으면 좋은 運이 한순간에 날아갈 수도 있거든요.

파토가 나면 중매인으로써의 그 마음고생은

겪어보지 않는 사람은 잘 모르실테고..

혼사가 늦어지는 자식때문에 밤잠이 안온다는 자매님의

고충을 생각하면.. 산다는게 참 간단하지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