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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방

부모님께 안부인사 드리세요

 

그림 / 구글검색으로..


 

2012.9.12

 

여준할아버지가 외출하거나 귀가할 때 우리식구들이

현관앞에 모여 맞이햇다는 대목에서 많은 분들이..

저도 그 분위기가 그립고 그리워서 목이 메일때가 참 많습니다..

지금은 여준이가 즈이아빠나 제가 나갈때 꼬박 인사를 합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그래서 습관이 무섭다는 것..

 

의식이 없을때도 아들과 손자는 꼬박꼬박 문안인사를 한 다음

직장으로 학교로 갔습니다. 저녁에 들어와서도 꾸벅 문안인사..

이것만은 정말 우리 집 家風으로써 자랑할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은 저도 보고 배워서 실천에 옮긴 것입니다..

 

1975년도에 남편직장 따라 대구로 이사를 갔습니다.

처음엔 대구시 남구 봉덕동 한옥마을에서 전세로 살았습니다.

ㄱ字로 된 넓은 한옥집인데 바깥체에 있는 마루와 방2개 부엌..

목욕탕과 화장실은 마당에 있어서 집주인과 함께 사용..

주인 내외분과 자녀는 3남 2녀..

 

그 당시 누나인 두 따님은 직장엘 다녔고 큰학생이 高三..

아저씨 아줌마가 외출하거나 귀가할 때 자녀분들이

공부하다 말고 대청마루에 나와서 도열..

비오는 날은 우산들고 마당을 가로질러서 대문까지 나가더군요.

 

일요일에는 다섯자녀들이 도열하는데

눈물나도록 감동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제 친정도 위아래 질서를 엄격히 지키는 집안이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거든요.

그 장면들을 늘 보면서 나도 자식 생기면 꼭~~~

 

여준아빠가 아장아장 걸을때부터 실천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몸에 배인것입니다..

이건 어릴때부터 체질화 되어야지 초등 高學年 되면 어렵습니다..

이미 대갈통이 커져 버렸는데 먹히기나 할까요..

 

봉덕동 한옥집에서 1년 살고 내당동 아파트로

이사를 갔는데 주인아저씨와 아줌마가 부처님이셨습니다.

아저씨는 국가공무원이셨고 아줌마가 왜관에 수시로 가셔서

논과 밭을 건사하시는데 규모가 상당히 큰지 오실적마다

들고오는 채소가 어머어마 했습니다.

 

저한테도 서슴없이 논아 주시고 그 집에서 사는동안

거짓말 하나 안보태고 채소값이 거의 안 나갔습니다..

하여간에 그 집에서는 무슨 선물이 들어오거나 명절때마다

음식 한쟁반 해서 저한테도 주시곤 하셨습니다.

답례로 저도 서울식 반찬과 김장김치를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특히 서울식 김장김치는 동료부인들로 부터도 대호평..

서울 김치가 그렇게 맛있는줄 몰랐다고 합니다..

먹거리도 주거니 받거니 해서 대구토박이 음식에 대해서도

좔 궤고 있습니다..


 

그중에도 잊히지 않는건 내당동아파트 분양공고가 나와서 신청..

입주날짜가 전세계약기간보다 3개월이 빨랐습니다.

혹시나 하고 말씀 드렸더니 냉큼 축하한다면서 전셋금을

미리 주시겠다고 나오셨고 이사 하는 날, 골목길 끄트머리라

길가까지 나갸야 하는 데 다섯 자녀분들이 이삿짐을 날라주었습니다.

아저씨도 아줌마도..

 

주인 내외분이 나서니까 친했던 이웃집 아줌마들도

덩달아 함께 나와서 거들어 주셧는데

그래서 제가 대구를 못 잊어 하는 것 같습니다.

 

일주일후에 가루비누 퐁퐁 휴지 들고 오셔서

감격에 겨워 엉엉 울기도 했습니다. 제 아들 돐때도 오셨고..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장마철만 지나면 한옥 마루며 천정을 마른 걸레로 닦아야 하는

연례행사가 있는데 저도 꾀병 부리지 않고 거들어 드렸고

아줌마가 왜관에 가시는 날은 일부러 외출을 안했고

두 따님 혼사때도 섭섭지 않게 축의금을 드렸구요

실패로 돌아갔지만 큰아들 중매도 섰습니다..


 

이쯤 되면 서로가 좋은 이웃이 될려고

피차 노력 했던 것 같습니다.